Yeseul

민성과 혜화역에서 데이트했다

그링이 어디서 얻은 후원주점 티켓을 쓰겠냐고 해서
그걸 핑계로 오랜만에 서울 데이트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에 자연이네 가는 길에 민성에게 전화를 걸어 제안했다.
거절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민성은 의외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수락했다.

민성은 데이트용 옷을 입고 왔고 그 중에서도 내가 좋아하는 옷이라 멋져 보였다.
후원주점은 사람이 많았고, 너무 시끄러워서 목소리를 높여야 했고, 돈을 내지도 평소 활동가도 아닌데 왔다는 셀프 뻘쭘함이 있었지만
그 모든 게 나는 재밌었고, 직전에 자연이와 4시간 폭풍 수다를 떨고 온 직후이기도 하고, 소리 지르듯 이야기하다 보니 더욱 더 상기가 됐다.
이런 조건들-특히 민성이 애매하게 아는 사람들이 많다는-이 민성이 좋아하는 것은 아니었기에 민성은 그저 그래보였지만 그렇다고 불만을 품고 앉아 있는 것 같아 보이진 않았고
내 제안이었다는 이유로 별 불평 없이 함께해주는 배려가 고마워서 나는 사랑이 한 번 더 넘쳤다.
음식은 어쨌든 푸짐했고 매운 음식과 고기가 있어서 민성도 좋아했다.

끝나고는 낙산공원을 걸었다.
오르막을 걷는 데도 땀 하나 안 나는, 그렇다고 춥지도 않은, 정말이지 완벽한 날씨였다.
쌍쌍이 차려 입고 온 사람들로 인구 밀도는 조금 높았지만 그것도 좋았고, 야경에 민성도 신이 났다.
조지아에서 갔었던 사랑의 도시 시그나기가 떠올랐고 우리는 단돈 3천 원에(저녁마저 후원 받았으니) 조지아에 왔다며 짠돌이 커플답게 감탄했다.
여기에 집을 사서 예슬이 숙박업을 할까 하는 헛소리, 서울의 관광도시로서의 매력과 케이팝데몬헌터스, 예전에 우리가 땀 뻘뻘 흘리며 여기 데이트 왔던 추억을 이야기했다.
다른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기억은 안 난다.

산책길 끝에서 DDP쪽이 내려다보이는 명당 자리에 벤치가 나서 얼른 차지하고 앉아서 또 좀 있었다.
시끄러운 클럽소리 같은 게 들리긴 했지만 동대문도 보이고 별도 보였다.

더 갈 데가 생각나지 않아서 종로를 걸었다.
한마리 6천원 통닭을 파는 술집들에 놀라고 연등축제 포스터를 보면서 '디자인 잘했다', '한국은 연등을 관광자원으로 더 개발해야 한다', '사람 많겠지' 같은 이야기를 하며 한적하고 별 거 없는 길을 걸었다.
그냥 더 있고 싶어서 정처없이 걸은 것도 오랜 만의 일이었다.

'너가 안 나올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흔쾌히 나와줘서 너무 고마웠어'라고 하니까 민성은
본인이 대만여행 다녀왔는데 내가 자연이와 약속을 잡아서 아쉬웠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하지만 자연과 내가 오늘 만난 건, 민성의 의견이었다!
자연이 날짜에 대한 선택권을 내게 줘서, 내가 그걸 민성에게 넘겼을 때, 민성은 여행 다녀오면 혼자 쉬고 싶을 것 같다면서 오늘 보라고 했었는데...
민성은 기억이 안 난다고 했다..
어쨌든 그때도 딱히 서운하진 않았었고 오늘은 나에게 반전을 선사해주어 더욱 기뻤으니 됐다.

손에 꼽을 행복한 데이트였다.

#hoard